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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힘을 이겨낸 27년의 후원 페이스북 트위터 퍼가기 인쇄
작성일 2016-05-10 조회수 5196

[후원자 이야기 02]


시간의 힘을 이겨낸 27년의 후원 



중앙대 교직원들의 작은 모임 <보호회>, 만 27년의 후원 

후원가정 101가구, 총후원금 4억 5,200만 원의 나눔



“적어도 아이들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매달 꾸준히 돕는 게 목표였어요. 

적은 액수지만 매달 안정적으로 돕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무려 27년간 따뜻한 마음으로 후원을 이어온 평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중앙대학교 교직원들의 모임 <보호회>입니다. 1989년 3월부터 한 달도 거르지 않고 27년간 어려운 국내외 아동, 저소득층, 독거노인, 장애인을 후원해왔습니다. 세이브더칠드런과도 27년의 고마운 인연입니다. 

연두색 봄빛이 환한 중앙대학교 교정에서 이 놀라운 모임, <보호회>의 조주형(중앙대 안성 총무처장) 님을 비롯해, 이규(중앙대 감사팀장) 님, 김진식(중앙대 특수대학원 교학지원팀장, <보호회> 후임회장 예정자) 님을 함께 만났습니다. 

내년이면 정년퇴임을 맞는 조주형 후원자님은 바로 27년 전 처음 보호회를 만든 장본인이고, 동석한 두 보호회 회원들은 ‘존경하는 선배님 따르다가 자연스레 참여하게 됐다’고 겸손해하셨는데, 어느덧 20년(이규), 15년(김진식)의 세월을 함께했습니다. 현재 보호회의 최연소 회원은 36살, 이제는 30대에서 60대를 아우르는 관록 있는 교내 모임으로 성장했습니다. 



처음 보호회 이야기 듣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정년퇴임하시기 전에 얼른 뵙고 싶었습니다.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저는 현재 중앙대학교(안성) 총무처에서 근무하는 조주형 처장입니다. 1981년 3월에 입사해, 중앙대학교에 근무한 지 만 35년이 지났네요. 내년에 정년퇴임합니다. 퇴임 후엔 그간 주말마다 보호회 활동을 잘 이해해준 아내와 여행을 다닐 생각이에요.(웃음) 



보호회는 조주형 처장님께서 시작하셨는데,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요? 


아마 중앙인 대부분도 마찬가지라 보는데, 우리 마음속에는 나보다도 더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다 있습니다. 저 역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런 마음을 항상 갖고 있었지요. 그러던 중 1988년 12월 초에, 한 라디오방송국에서 ‘소년소녀가장’ 특집방송을 청취하면서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방송국에 전화하게 됐어요. 그때 그 특집방송을 주관한 세이브더칠드런(구 한국어린이보호재단)을 직접 방문해 취지를 설명한 뒤, 후원아동을 선정하고 1989년 3월부터 후원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후원한 소년소녀가장이 약 100가구에 이른다고 들었습니다.


1989년 시작 당시에는 1가구였으나 2016년 4월 26일 현재(인터뷰일 기준)는 13가구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애들이 만 18세가 넘으면 후원이 종결되는데, 후원종결된 88가구까지 합하면 이제껏 총 101가구에 4억 5,200만 원을 후원해온 것이지요. 







27년간 후원하셨으니 처음에 후원한 학생은 이제 어른이 되었겠네요? 


1989년 첫 후원 시작이 사내 녀석이었어요. 할머니랑 같이 사는 초등학교 4학년생, 키도 120센티미터에 11살짜리 조그만 꼬마였는데, 지금은 무려 187센티미터에 공군에 지원해 군대도 다녀오고 지금은 사업을 하는 38세의 장정이 되었답니다. 기술자격증도 땄고, 자신도 이제는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말합니다. 그 아이를 1998년까지 9년간 후원했지요. 



조주형 후원자님은 지금껏 정리해온 후원파일을 가져와 꼼꼼하게 짚어가며 설명해주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후원‘모임’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둬야 투명하기 때문입니다. 몇 년간 얼마를 후원했고 어떤 처지의 아이인지, 어떤 어려움을 헤쳐나왔는지 100여 개에 가까운 긴 목록을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아이, 저소득 가정의 아이, 소년소녀가장, 장애인 가정, 상황이 나아져 나중에 종료를 희망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종결 후 다시 동생에게도 후원이 이어진 아이들, 힘겨움을 잘 이겨내고 공부해서 대학에 진학한 아이들, 자격증을 딴 아이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가득한 메모, 네팔이나 저 먼 나라 아이들의 낯선 이름들, 헌옷수집, 쌀푸대 기증, 무의탁노인 무료이발봉사, 기숙사 학생들에게 제공한 식사, 흑석3동 동사무소를 통한 저소득노인 돕기…. 

후원파일에는 27년의 만남이, 시간이, 자부심이, 눈물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습니다. 제1회 어린이보호대상으로 받은 상금 1백만 원을 모조리 기부한 내역도, 중앙대 교직원 동료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상갓집에서 본 어린 아들이 눈에 밟혀 ‘주변도 돕는데 우리 동료 아이도 돕자’며 아이가 대학입학 때까지 후원했던 사연도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은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꾸준히, 적은 액수지만 매달 안정적으로 돕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조주형 후원자님은 회상합니다. 








보호회 회원도 이제는 많이 늘어났는데요. 탁월한 지도력 때문이십니까?(웃음)


처음에는 교직원 5명이 시작했는데 지금은 참여자가 82명(교수 27명, 교직원 55명)이 됐어요.(최고로 많았을 때는 180명으로, 교수 54명, 교직원 126명, 매월 220만 원 후원) 1989년 처음 시작했을 때가 제가 사범대에서 근무했을 땐데, 사범대 교수님들의 참여도가 상당히 높았어요. 또 지금 우리 회원들 중에는 어려운 처지의 경비원들도 계시는데, 본인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동참하셔서 항상 저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이야기지만, 중앙대학교 청소부 아주머니들이 1년간 폐품수집으로 마련한 귀한 성금을 제게 전달하셔서, 전액을 흑석동 무의탁노인들에게 보냈던 것도 참 소중한 기억입니다. 또 한동안은 중앙대 노동조합과 심장병환자돕기를 위해 사랑의 물방울 활동, 여직원회와는 노력봉사도 같이했습니다. 





모두 보호회에 참여하는 분들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진 결과라고 봅니다. 회원이 늘면서 후원금도 늘어났겠네요. 때문에 후원 범위도 넓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1인당 1만 원씩 후원했는데, 지금은 부담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5천 원에서 3만 원까지 자율적으로 후원금액을 본인이 결정합니다. 후원금이 처음의 5만 원에서 이젠 101만 원으로 늘어났어요. 후원대상자 선정은 세이브더칠드런 외에도, 중증장애인 38명이 생활하는 포천 나눔의집, 상도종합복지관, 흑석동사무소 등을 통해 선정된 가정에 적게는 5만 원에서 20만 원까지 가정환경에 따라 차등지원 해요.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자립능력이 생기는 시기, 즉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매달 고정적으로 지원해 경제적 도움과 마음의 안정을 주고 싶었습니다. 훗날 이들이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도움받은 것을 환원하고, 자연스레 자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목적에 있었고요.



27년이라는 세월 동안 꾸준히 '보호회' 활동을 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요?


시작이 반이라고 하죠. 단지 누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가가 매우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정이 많아서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해요. 어려울 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니까요. 아마도 이 일은 제가 정년퇴직할 때까지는 꾸준히 해야 할 것이고, 중앙대학교가 없어지지 않는 한 지속될 거라고 기대합니다. 



지금껏 후원하시면서 가장 기뻤던 일, 혹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요? 


가장 기뻤던 일은 우리 보호회의 후원을 받아 어려움을 극복한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었다는 소식, 사회인이 되어 도움받은 만큼 잊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후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입니다. 

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요. 어느 해엔가 11월쯤 세이브더칠드런(구 한국어린이보호재단) 사무실에서 후원아동을 만나 선물도 전달하고 같이 밥도 함께 먹은 적이 있어요. 그 후 아동의 집을 방문해 몸이 아프신 할머니에게 떡을 전달했지요. 그런데 아이에게 선물전달하는 모습이 참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나중에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도덕교과서에 그 사연이 실렸던 적이 있습니다.(웃음) 














대학에 계시면서 정말 많은 젊은이들을 만나고 계신데요. 대학교도 시대에 따라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갈 우리 젊은이들에게 짤막한 격려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려운 경제환경 때문에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마련해야 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모두가 힘든 시대지만 젊어서의 어려움을 잘 극복하면 사회생활에서도 누구 못지않게 인정받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대학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할 때, 항상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배려와 봉사를 실천하는 겸허한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 모두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이브더칠드런 후원자님들 중에도 50대 이상 중장년층 분들이 많으신데,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해주세요. 


어려움에 처한 남을 돕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바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야말로 중요합니다. 저 역시 누구나 갖는 그 마음을 바로 실천으로 빨리 옮긴 것에 불과해요. 이 일을 하면서 다시 깨닫는 것은, 생각보다 남모르게 누군가를 돕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그걸 알 때마다 놀라게 됩니다. 다들 어렵지만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것이 진정한 도움이고, 그래서 더 뿌듯한 것입니다. 

액수는 그래서 중요하지 않아요. 첫 단추를 끼우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다음부터는 당연하게 지속하는 거구요. 정말 처음이 중요합니다. 1만 원 돕는다면 남들한테도 쑥스럽고 이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지만, 이 돈이 한 가정의 점심값이 될 수도 있어요. 우리가 낸 것은 적은 돈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 돈으로 생긴 밥 한 끼가 누군가의 생명을 이어줍니다. 마음이 정말 중요하고, 시작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말하고 싶습니다.



자, 이제 꾸준히 같이 활동해오신 이규 선생님께서도 그간의 많은 추억이 생각나실 텐데요, 심경 한 마디 말씀해주세요. 


사실 저희가 대단한 일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1달 1만 원, 3만 원. 적은 돈일 수도 있는데 사실 아까 선배님도 말씀하셨지만, 적은 액수라서 이거 내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사실 좀 멋쩍다, 느낄 때도 있어요. 하지만 라면 1박스에 2만 원이라 치면, 그것은 한 가정이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점심값 1달치이기도 합니다. 금액이 적더라도 그건 누군가가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귀한 돈입니다. 

중요한 건 그게 내겐 적은 돈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가치가 있는 돈이라는 걸 정확히 안다는 것이죠. 3만 원이 적고 모자라 보일 수 있지만, 당장 많은 게 부족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겐 다릅니다. 다른 가치가 됩니다. 

지금 학생들에게 봉사는 ‘스펙’이 되었더라고요. 그게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이런 필요에 의해서 실천했더라도 분명 계속하다 보면 보람을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단 후원을 시작해보면 사람은 달라집니다. 그 기쁨은 정말이지 기분 좋고 값진 것입니다. 저희도 그렇게 이어온 것이지요. 






이제 내년이면 영광에 찬 보호회 후임회장이 되시는 김진식 선생님께서도 보호회 활동하시며 인상적이었던 점, 부탁드립니다.


한참 예전에 조주형 선배님 따라 장애인시설에 우연히 목욕봉사 갔다가 내 인생 최초로 큰 감동을 느낀 적이 있어요. 사실 목욕이 별 거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중증장애인들, 그분들 목욕 한 번 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씻고 난 후 그분들 표정 본 적 있으세요? 그 표정은 ‘천국이 있다면 여기다’, 하는 그런 표정입니다. 정말 행복해하세요. 

또 축사개조해서 지은 장애인시설에 선배님 따라가 삽질 열심히 해서 김장독 파묻은 것도 기억납니다. 그땐 신입사원 시절이라 제가 땅은 잘 팠습니다.(웃음) 

그리고 전에 이규 선생님과 함께 중앙대 대학생 해외봉사단 활동을 꾸린 적도 있는데, 공대생 하나가 필리핀에 봉사활동 가서 펑펑 울더니 휴학하고 인생행로 바꿔서 지금 NGO에서 일하고 있어요. 지금도 그 친구 만나면 ‘선생님이 제 인생을 바꾼 사람입니다’ 해요. 봉사라는 경험이 사람을 바꾸는 놀라운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사실 누구나 알아서 실천한다면, 세이브더칠드런이나 이런 단체들은 필요가 없겠죠. 



세 후원자님은 인터뷰를 마치고, 그동안 받은 후원아동의 편지와 사진을 같이 보면서 웃었습니다. ‘보호회여, 번영하라’ 외치며 힘차게 기념사진도 중앙대 연못 앞에서 찍었습니다. 보호회의 모든 회원님들,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저희 세이브더칠드런과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이선희(후원관리부)        사진 조주형 제공



세이브더칠드런을 존재하게 하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힘은 누구보다 후원자님들입니다. 매달 꼬박꼬박 보내주는 후원금에서, 가끔 전해지는 사연과 편지에서, ‘내가 늙어서 돈이 얼마 없어. 그래도 애들은 도와야지’ 하시던 할머니, 할아버지 후원자님들의 조용한 음성에서, 스무살 청춘 후원자님의 웃음에서, 아이 이름으로 후원신청하는 엄마 아빠 후원자님들의 마음에서 

세이브더칠드런은 더욱 활력을 얻습니다. 

후원은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좋아지게 바꾸는 힘입니다. 

앞으로도 작은 도움이 누군가에겐 인생의 힘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 후원자님의 목소리를 찾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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