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브더칠드런소식지 149호
[클로즈업] 당신이 알지 못했던 '에글렌타인 젭'에 대하여
2019.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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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브더칠드런 창립자인 에글렌타인 젭은 수많은 아동을 구한 활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금에 어려움을 겪던 시절도 있었고,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잊어버리고 기차에 짐을 두고 내릴 때도 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건강을 잃었고 조울증을 앓기도 했습니다. 오직 아동을 위해 일하는 세이브더칠드런 창립자가 되기까지, 우리가 몰랐던 에글렌타인 젭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내 이름은 에글렌타인 젭, 세이브더칠드런 창립자죠. 1876년 영국에서 태어났어요. 대학 졸업 후 노동자 계층 자녀들이 다니는 여자 학교에 교사로 취업했어요. 당시 여자 학교에서는 살림하는 법을 가르쳤는데 집에서 한번도 바느질이나 밥 짓는 걸 배운 적이 없던 내가 어떻게 아이들에게 살림하는 법을 잘 가르칠 수 있었겠어요. 학생 수가 느는 게 고문처럼 느껴질 정도였죠. 하지만 거기서 포기하면 에글렌타인이 아니죠. 아이들이 재미있게 수업에 참여하도록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어요.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처럼 들려주고 런던탑에 함께 방문해 아이들이 직접 보고 경험하며 재미를 느끼게 도와줬어요. 수업에 임하는 아이들 태도가 달라지더군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 때 깨달았어요.



몸과 마음이 아파 본 적 있나요?
더는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던 때가 있어요. 교사를 그만 두고 고향집에 내려갔죠. 숙모와 기금 모으는 일을 하게 됐는데 이 일을 하며 기금 모으는 활동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시간이 흘러 1차 세계대전도 끝이 났어요. 경제봉쇄정책 때문에 패전국의 아이들은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어요. 내가 본 여자 아이는 영양실조로 팔 다리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했어요. 이 아이를 찍은 사진으로 전단지를 만들어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배포했죠. 그날 난 적국을 돕자는 전단지를 배포한 죄로 경찰에 잡혀갔고 5파운드 벌금형을 선고 받았어요. 사연을 접한 검찰총장은 후원을 약속하며 5파운드를 기부하더군요. 그것이 곧 세이브더칠드런의 시작이에요.



전쟁을 경험해본 적이 있나요?
난 있어요. 사업현장 모니터링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발칸 지역에 갔어요. 식량은 부족했고 고아가 되거나 부모와 헤어진 아이들은 늘어만 갔어요. 전쟁을 돕겠다고 나선 교사들이 학생들을 기숙사에 버려두고 가는 바람에 먹을 것이 떨어진 아이들은 침대에 누워 죽기만을 기다리는 일도 벌어졌죠. 전쟁 때문에 아무 죄없는 가난한 아이들이 대가를 치르고 있었어요. 전쟁을 경험하며 국적, 인종, 종교를 구분하는 일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됐죠. 그래서 구호활동에 필요하다면 정치적 접근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러시아가 최악의 기근에 시달릴 때도 구호를 위해 여러 나라 정부와 협력해 러시아 난민아이들에게 음식을 나눠주었죠. 세이브더칠드런은 당시 구호활동을 벌이기 가장 힘든 러시아에서 효과적으로 활동을 벌인 기관으로 사람들 사이에선 입소문이 자자했답니다.



제가 말했나요?
산에 오르는 걸 좋아한다고… 여느 때처럼 산에 오르던 날이었어요. 또래 친구들과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아이들에게도 놀고, 쉬고, 배울 권리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힘없는 아이들의 권리를 지켜주고 싶더군요. 집에 돌아와 펜과 종이를 꺼내 5가지 조항을 써 문서로 만들었어요. 세이브더칠드런 연맹 회의에 아동에 대한 어른의 의무 5가지를 상정해 ‘아동권리에 관한 제네바 선언(유엔아동권리협약의 모태)’을 국제연맹이 채택하도록 했어요. 아이들을 위한 선언문인 만큼 아이들이 함께할 수 있게 아동 인권 선언문 조항을 그리는 그림 대회도 열었고요. 선정한 2000개 작품을 다른 나라에서도 전시했죠. 아동권리를 지키기 위해 언론과 대중의 대대적인 관심이 필요했거든요. 꽤나 성공적인 프로젝트였어요.                        




 미디어커뮤니케이션부 이정림   그림 백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