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브더칠드런 소식지 여름호(163)
자녀 살해 후 자살, 반복되는 비극을 막으려면
20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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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더 이상 아동학대를 용인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아이들의 고통과 죽음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기억되지 못하는 죽음이 있습니다. 가장 의지해 온 부모에 의해 목숨을 잃은 자녀 살해 후 자살 피해 아동들입니다. 이 잔혹한 범죄는 아동학대로 미처 이름 붙여지지 못한 채 ‘한 가정의 안타까운 비극’으로 기억되다 쉽게 잊히고는 했습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정부에 자녀 살해 후 자살을 아동의 고유한 생명권을 박탈하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아동학대로 명확히 규정하고 이를 막기 위한 대책을 신속히 마련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미흡한 현황 파악과 대응
지난해 인재근 의원실이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20년까지 8년간 발생한 살해 후 자살 사건의 가해자 수는 416명에 달합니다. 1주일에 1명 꼴입니다. 2006년~2013년 7년 3개월간 경찰청 전산망에 입력된 국내 살인사건 기록을 전수 분석한 결과 자식 살해 사건은 총 230건으로 연간 최대 39건에 이릅니다. 부끄럽게도 자녀 살해 후 자살로 사망하는 아동 현황에 대한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통계 자료는 없습니다. 위와 같은 자료에 기대 수많은 아동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짐작할 따름입니다. 많은 어린 생명이 부모에 의해 스러지는 동안 비극의 원인을 파악하려는 노력이나 정부 차원의 대책은 미비했습니다. 죽음의 원인을 묻지 않는다는 건 반복될 다음 비극에 어떠한 대비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 정부가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의 생존과 발달을 최대한 보장해야 할 국가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제6조 제2항). 가정에서 아동을 잘 키우기 어려운 경우 국가가 나서 지원해야 한다고도 명시하고 있습니다(제18조 제2항). 자녀 살해 후 자살을 더 이상 가정에서 벌어진 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하는 문제로 바라보고 대책을 세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국가의 역할을 묻습니다
자녀 살해 후 자살에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세이브더칠드런이 지난 4월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대표의원 고영인·인재근, 연구책임의원 최종윤)와 공동으로 개최한 <자녀 살해 후 자살 대응 국제심포지엄: ‘개인의 비극’ 너머 대안을 묻다>에 참여한 많은 국내외 전문가들은 자녀 살해 후 자살은 예방이 가능하며 죽음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대책 마련을 시작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또 위기 상황에 놓인 가정을 위한 복지서비스의 중요성도 강조했습니다.
기조강연을 맡은 경희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백종우 교수는 자녀 양육의 책임이 가족 등 혈연에서 국가로 옮겨가고 있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습니다. 이어서 “누구나 위기 상황이 겹치면 극단 선택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 국가가 책임을 갖고 도울 수 있게 준비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캐나다 웨스턴 대학교 여성 및 아동 폭력 연구교육센터의 마이클 삭스톤 연구원은 “위험은 아동을 포함한 가정폭력 위험 평가를 통해 예측이 가능하다”고 짚었습니다. 또 가정 내 살인사건을 조사하고 검토하는 온타리오주의 ‘가정폭력 사망 검토위원회’를 소개하며 “아동 보호 사례에 대한 동향 파악과 위험 요인에 대한 패턴을기반으로 가정폭력에 노출된 아동에게 가해지는 위험을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다”며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에서 가족 구성원과 지역 기관이 인식하는 경고 신호를 면밀하게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독일 함부르크 경찰응용과학대학교 울리케 재링어 교수는 1997년~2012년 16년간 독일에서 발생한 아동 살해 사건 727건의 법원 기록을 전수 조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특별한 위험 신호를 보이지 않는 가정에서도 자녀 살해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며 “아동이 항상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복지 지원 전반을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습니다.
가족 살해 범죄를 연구한 경험이 있는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홍영오 선임연구위원은 자녀 살해 후 자살에 대한 연구가 없어 위험 요인 규명과 예방책이나 대응 방안 마련이 쉽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가족살인분석위원회와 같은 것을 구성해 사례 축적과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여타) 아동학대나 다른 나라와의 문화와는 구분해 사건의 특성을 파악하고 사회적 취약계층 안전망 강화 등 정책 대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아이들의 죽음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 위해
세이브더칠드런은 포럼에서 나온 다양한 논의 결과를 바탕으로 정부에 ‘자녀 살해 후 자살’ 대응책 마련을 촉구할 예정입니다. 먼저 똑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아동사망검토 제도’의 신속한 도입을 촉구합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사망 사건을 체계적으로 분석할 때에야, 우리 사회가 놓친 위기 신호와 개입의 기회를 밝히고 죽음을 막을 실효적인 대책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 살해 후 자살을 여전히 ‘한 가정의 비극’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균열을 가하고 국가와 사회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로 인식하도록 자녀 살해 후 자살을 아동학대로 명확히 규정하고 관련 현황을 파악할 것도 요구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정의 위기가 아동 살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상담 기관과 인프라 등 사회 안전망 강화도 주문합니다.
우리에게는 짧은 생을 마감한 아이들이 남겨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의무가 있습니다. 비극에 손 놓지 않고, 아이들의 고통과 죽음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회가 되도록 꾸준한 관심과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권리옹호부문 아동권리정책팀 박영의
사진세이브더칠드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