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브더칠드런소식지 145호
[나누는 사람들] 45년간 매달 15달러,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후원자를 기억합니다
2018.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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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는 사람들]


45년간 매달 15달러,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후원자를 기억합니다

- 해외결연아동에서 세계적인 에이즈 연구자로, 조명환 교수 이야기




아동개인정보와 신변보호, 아동간 상대적인 박탈감 예방 등을 위해,  현재는 세이브더칠드런을 통한 아동과의 서신교환이나 만남 이외의  개인적 교류는 허용되고 있지 않는 점, 양해바랍니다.



얼마 전, 세이브더칠드런에 특이한 문의가 있었습니다. ‘1950년대 아동구호연맹에서 해외결연후원을 받았는데, 현재의 세이브더칠드런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서는 ‘KC 3868’라는 후원아동 등록번호와 몇 장의 오래된 흑백사진. 그런데 세이브더칠드런 US의 화재로 당시 기록이 유실되어, 사연을 확인하고자 만난 자리에서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1956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태어난 한 소년이 이제 초로의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건국대 연구실에서 만난 조명환 교수(생명과학특성학과)는 죽을 때까지 45년간 매달 15달러 해외결연후원을 이어간 ‘나의 후원자’, 에드나 넬슨 어머니를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1956년에 해외결연이 시작됐는데 원래 후원자는 헬렌 넬슨, 그러나 후원 시작 3년이 지나 사망하면서 언니 에드나 넬슨에게 한국소년의 후원을 지속해달라고 유언했습니다.

에드나 넬슨, 한 소년이 자라나 대학교수가 된 후에도 45년간 매달 꼬박꼬박 15달러를 보내온 놀라운 사람. 평생 교사로 일했으며, 퇴직 후엔 편의점 직원으로 일하며 작은 마을에서 살았고, 104살로 죽는 날까지 한평생 생면부지의 한 소년을 격려했습니다. 


소년은 힘들게 공부해 미국에서 미생물학과 면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로 연구를 지속하다가 현재 아시아태평양에이즈학회 회장으로 에이즈 퇴치에 앞장서며 세계적인 보건정책전문가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열린  10차 아시아태평양에이즈대회 장면. 회장 조명환 교수가 연설중입니다.


                       

Q 반갑습니다. 어린 시절에 결연후원 받은 기관을 최근 수소문해 세이브더칠드런임을 확인했다는 사연, 들었습니다.

A 사실 저는 평생 후원받은 일을 말한 적 없어요. 가난이 자랑도 아니고. 그러다 재작년 강사로 초청받고 3,000명 앞에서 처음 말했어요. 어려웠지만 결심했죠. ‘나는 45년간 후원받았다. 이제 에드나(후원자 이름) 어머니 이야기를 해야겠다’…. 


사실 45년간 후원한다는 게 대단한 일인 것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주변에 물어보니 1~2년 해외결연 하다가 많이 중단한대요. 그분들이 제가 45년간 후원받았다고 하니 정말 감동하더군요. 어떤 분은 막 울어요. 후원하던 아이한테 미안하다고.(웃음) 


작년에 <꼴찌박사> 책을 출간하면서, 어릴 때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간 ‘아동구호연맹’이 대체 어느 기관인지 궁금했어요. ‘아동’, ‘구호’ 단어가 들어간 곳부터 찾았죠. 제가 먼저 세이브더칠드런(‘아동구호’라는 뜻)에 연락했습니다. 지금도 제겐 후원아동번호와 영어 메모가 적힌 흑백사진이 있거든요. ‘KC 3868’, 1963년 사진인데, 뒷면엔 ‘To Myong from Edna Nelsen’, 연필 메모가 있어요. 세이브더칠드런에서 확인해줬어요. ‘KC’로 시작되는 일련번호, 그거 우리가 썼던 방식이 맞다.’고요. 정말 나의 뿌리를 찾은 기분이었습니다.


▲ 지금도 간직한 후원아동번호가 적힌 오래된 흑백사진. ‘KC 3868’, 1963년 사진. 뒷면엔 ‘To Myong from Edna Nelsen’이라는 메모. 세이브더칠드런의 일련번호 양식입니다. 


Q 45년의 후원, 드문 일입니다.(보통 만 18세까지 결연후원이 가능)

A 그게 기적 같은 사랑이었다는 건 이제야 알았어요. 영어로 편지 쓰면 주소 알려주마, 하셔서 청년이 된 후 직접 편지를 주고받았지요. 대개 후원아동이 성인이 되면 그만두는데, 그분은 제가 대학교수가 된 후에도 매달 편지에 15달러를 동봉하셨어요.

                       

Q 해외결연은 ‘한 아이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후원’이라고 합니다. 해외결연후원에 대해 후원아동이었던 교수님의 생각은요?

A 가난해서 후원받는 게, 기분 좋지는 않죠. 하지만 큰 축복이기도 해요. 저 바깥에 커다란 세상이 있구나, 호기심을 갖게 됐고 결국 제가 나중에 유학가고 국제무대를 뛰어다니며 일하는 데 큰 영향을 줬습니다. 새로운 나라를 생각한다는 건 새로운 언어, 문화, 사고가 들어온다는 거고, 결국은 나의 꿈으로 연결돼요. 후원자들이 ‘적은 돈이다.’ 생각하시는데, 실은 물질적 후원 이상으로 아이에게 커다란 의미와 영향을 줍니다. 


에드나 어머니도 제겐 그런 존재였어요. 계속 물어보셨죠. ‘커서 뭐가 될래?’ ‘소방관이요.’ 그러면 또 답장이 옵니다. ‘너는 세계 최고의 소방관이 될 거야.’ 아이들은 자꾸 꿈이 바뀌잖아요. ‘야구선수가 될래요’, 하면 ‘너는 세계 최고의 야구선수가 될 거야’, 늘 ‘너는 세계 최고가 될 거야.’라고 하셨습니다. 늘 꿈이 바뀌어도 아무 말 안 하셨으니, 저는 늘 새로운 꿈을 가질 수 있었죠.


Q 놀라운 분이에요. 수백 통 편지를 주고받으며 인상적이었던 기억은?

A 나중에 물어보니 ‘어려운 환경이었으니 꿈을 심어주고 싶었다. 다 잘될 거란 말을 해주고 싶었다.’고 하셨어요. 또 45년간 변함없이 보내주셨던 두 문장이 있어요.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다.… 너를 위해 기도하마.’ 


주고받은 편지도 540통이 넘어요. 부를 이룬 후 기부하는 훌륭한 사람들도 많지만, 에드나 어머니는 부자가 아닌데도 더 가난하고 어려운 아이들을 도왔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론 더 대단한 사람이지 않나, 생각해요. 


▲ 45년간 주고받은 540통이 넘는 편지. 평생 잊을 수 없는 15달러가 동봉된 편지였습니다.


Q 후원자를 직접 만나러 가셨는데, 실제로 만나니 어땠나요?

A 미국 유학 가서 제가 세 차례 찾아가겠다 했죠. 그런데 늘 절대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결국 유학생활 10년간 한 번도 못 봤어요. 귀국해서 교수가 되고, 이 분이 만 99세가 됐을 때, 안 되겠다, 살아계실 때 봐야 한다, 연락도 없이 네브라스카 주로 찾아갔어요. 아주 작은 시골이었어요. 잘사는 미국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25년간 초등교사로 지내시고, 비행기 한 번 안 타본 그런 검소한 분이었어요.


동네 가게에서 물어 찾아갔죠. 1층에서 기다리는데 2시간 가까이 안 나타나셨어요. 별 생각 다 들었죠. 싫은데 찾아왔구나, 후회도 하고. 그런데 2시간이 지나자 2층에 후광 때문에 정말 천사 같은 모습이 나타났어요. 목욕하고 이쁜 귀걸이, 목걸이도 하고 빨간 구두도 신고, 저를 만나기 위해 단정하게 차려입으셨던 거예요. 99세라 몸이 불편해서 그렇게 오래 걸린 거였어요.


▲  마침내 에드나 어머니(당시 98세)를 만났습니다.


제겐 그 모습이 세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었습니다. 아주 오래 걸려 계단을 내려오셨죠. 제 나이 40살이 되었을 때입니다. 1주일을 같이 지냈어요. 평생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Q 어엿한 성인이 된 교수님을 보고 무척 기뻐하셨겠어요. 가장 궁금한 건 뭐였나요?

A 사실 한 가지 질문이죠. “어떻게 이렇게 오래 저한테 사랑을 베풀 수 있었나요?”라는 질문. 첫날 물어봤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다. 서로 작은 사랑을 내놓으면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겠니?” 지금 저도 에이즈로 고통받는 아이들 돕는 일을 하다 보니, 그저 사랑의 행위를 변함없이 보여주란 말이구나, 생각해요.

          

           

Q 대학공부나 유학생활 때 가장 힘이 된 건 무엇이었나요? 

A 어릴 때부터 공부를 못해서 별명이 ‘형광등’이었어요. 고3 때 대학 갈 성적도 안 됐는데, 마침 아버지 지인인 건국대 교수님이 집에 오셨어요. “대학 갈 때 안 됐나?” “갈 수 있는 데가 없습니다.” 했죠. 그랬더니 미생물공학과가 가끔 미달이니 넣어보라는 겁니다. 그땐 생명공학이란 단어가 아예 없었어요. 두 달간 미적분 공부해서 간신히 들어갔어요. 가서 너무 힘들었어요.(웃음) 1학년 때 물리학, 화학, 수학 다 D, D, D…, 사실 익숙한 점수였죠. 그전에도 ‘미’가 두어 개 나오면 온 가족이 기뻐했거든요.(모두 웃음)


어쨌든 졸업할 때는 A- 받았고, 오하이오주립대로 유학갔죠. 그런데 곧 유급에 학사경고 받고 공원에서 종일 울고 헤매며 지냈어요. 에드나 어머니에게만 말했죠. 한국에도 못 가고, 받아주는 다른 대학도 없고, 정말 나락이었죠. 그때 끝까지 신뢰하고 편지 써주고 기도해주신 그분 때문에 다시 힘을 얻었어요. 


그러던 중 기적처럼 단 한 사람, 애리조나대의 찰스 스털링 박사가 저를 받아줬어요. 당시 초기였던 에이즈 전문가였죠. 그 시절, 미답의 땅이었던 에이즈 연구를 문과생이었던 제가 하게 된 거예요.



 에이즈가 뭔지도 몰랐던 그 시절, 미답의 땅이었던 에이즈 연구를 하게 됐습니다.


Q 놀라운 인생역정입니다. 이외에도 인생이나 연구에서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요? 

A 바루크 블럼버그 박사를 꼽고 싶어요.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로 간염바이러스 최초발견, 백신개발자입니다.(웃음) 건국대 개교 50주년 기념강연 청탁을 하러 제가 미국까지 찾아가서 하루를 꼬박 복도 의자에서 기다리는 무모한 투혼 끝에 결국 그분이 한국 강연을 하게 된 인연이 있어요. 그런데 6개월 뒤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스탠포드대로 같이 가자고. 


거기서 연구생활 1년 했지요. 그런데 세계적인 에이즈 대가인 메리건 교수와 연구하는 한편, 저녁이나 티타임에 블럼버그 박사가 저를 자꾸 불러요. 그러면서 유명한 학자들, 노벨상 수상자들, 실리콘밸리 경영자들, 정재계 인사, 심지어 NASA 우주인까지 과학, 정치, 경제, 경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제가 다 만나게 된 겁니다. 처음엔 이해가 안 갔어요. 물어봤죠.


그런데 5개월쯤 지나자 알았어요. 미생물학, 면역학, 에이즈 연구만 머릿속에 꽉 차 있던 제가 바뀌기 시작했어요. 같이 대화하면서 같은 이슈를 놓고도 견해가 다양하다는 걸 깨달았죠. 그와의 만남으로 완전히 제 뇌가, 사람이 바뀌는 경험을 했어요. 결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 가서 행정학 공부를 했죠. 49살 때 교수직을 잠시 내려놓고 생물학 교수가 엉뚱하게 행정학, 정치학, 경제학, 리더십 공부를 시작한 거예요. 그때 주변서 왜 이러냐, 미쳤냐, 말리고 난리였죠.(웃음) 그 후 아시아태평양에이즈학회 회장이 된 겁니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졸업식. 생물학 교수였던 그는 49살 때 교수직은 잠시 내려놓고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 아시아 태평양 에이즈학회 회장이 되어 에이즈 퇴치운동도 시작하게 됩니다.


Q 그때 어떤 세상을 만난 건가요?  

A 사실 실험실에서 연구만 하다가 현장에서 에이즈 환자들, 가족을 만나면서 고통과 가난도 만나게 됐어요. 이제 에이즈는 질병 이슈가 아니라, 정치경제적 이슈, 즉 빈곤, 불평등의 문제예요. 아프리카인들에게 약이 전달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는 치료비 모금, 정책과 예산집행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에이즈학회장 돼서도 기업인, 정치인, 유엔기구 리더들을 만나 설득하고 후원금을 유치하고 예산, 정책 논의를 하는 거죠. 즉, 제 길이 에이즈 연구자에서 보건정책, 사회활동가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UNAIDS(유엔 산하 에이즈전담기구), 빌게이츠재단, 빌클린턴재단과 일하고, 국제회의에도 가고, 국제질병퇴치기금과도 일해요. 그러면서 제가 일하는 국제의약품구매기구에서 ‘고통없는 후원Painless Contribution’, 즉 ‘생활이 자연스레 기부로’ 연결되는 후원방식도 고안했어요. 항공료에서 1천원이 자동기부 되면 누구나 후원할 수 있죠. 8개국에서 5년간 2조 2천억을 모아 아프리카에서 에이즈, 말라리아, 결핵 등으로 고통받는 아이들 1백만 명을 치료하고 있어요. 




Q 언제 가장 행복하십니까?  

A 사실 이런 질문은 처음인데, 행복한 순간이 금방 생각나지 않았어요. 기쁜 순간은 많았어요. 유학, 박사학위 받았을 때, 교수 됐을 때…, 그런데 그건 행복이라기보다는 기쁨이었죠. 그럼 언제 행복한 걸까? 사실 제가 태국 적십자에서 에이즈 남성을 상담한 것이 에이즈 퇴치운동에 나서게 된 계기였어요. 수직감염 된 아기까지 온 가족이 다 HIV바이러스 양성이라는 재앙만 확인시켜주고 갈 수 없어서 아기 치료비를 제가 냈어요. 아기들은 50만원 비용으로 2~3년 치료하면 완치돼요. 


그 아이가 살아서 이제 12살 됐어요. 교수 됐을 때의 기쁨은 지금 생각도 안 나요. 지금도 그 아이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걸 보면서 ‘내가 사람을 살렸구나, 생명을 구했구나.’ 정말 행복감을 느껴요. 지금도 제가 도와주는 길거리에 버려졌던 아프리카 에이즈 고아들이 잘 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어요.


▲ 방글라데시 아이들과 함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빈곤, 불평등 속에서 고통받는 아이들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결심합니다.


Q 세이브더칠드런은 에이즈 예방교육을 펼칩니다. 에이즈 전문가로서 NGO 보건정책 방향에 대해 조언해주신다면?  

A 우선 산모⁻영유아 감염이 문제인데, HIV/AIDS 예방교육, 인식개선 프로그램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어요. 무엇보다 에이즈가 퇴치되려면 정부, 기업인, 정치인 등이 나서야 합니다. 2030년까지 에이즈 퇴치를 위해 국제기구나 NGO 등과 함께 노력할 겁니다.


Q 어려움 속에서도 과학자, 벤처기업인, 사회활동가로서의 길을 걸어오셨는데요. 지금 이 시대의 젊은 친구들에게 한마디 부탁해요.

A 이 시대 청년의 고통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청년기는 어느 시대나 다 어렵죠. 그러나 힘들어도 포기 않고. 소망을 가지면 나아가요. 에드나 어머니가 계속 제게 꿈을 물었던 이유가 뭘까, 생각해요. 그래, 넌 가난해. 하지만 이게 너의 끝은 아니야. 꿈을 가지고 계속 걸어가라…. 그런 마음이었던 거예요. 교수 된 후에도 매달 편지를 보내온 이유는 그걸로 끝이어선 안 된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걸어가라, 그런 의미였을 거예요. 여기서 안주하지 말아라, 이제는 더 큰 세상, 더 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Q 세이브더칠드런 후원자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A 에이즈 치료를 해준 아이 이야기처럼, 제 꿈을 이룰 때보다 남을 도울 때 행복하구나, 깨달았어요. ‘그럼 에드나 어머니가 45년간 날 도운 것도 그거였겠다, 날 보며 행복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분은 행복한 마음으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 유학, 박사, 교수의 길을 걸어가는 저를 바라보셨을 거예요.


저도 세이브더칠드런 후원자들에게 그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어요. “사랑의 행위는 첫째는 사람의 행위로부터 나온다.”는 걸 다시 생각합니다. 15달러를 매달 보내주던 그 마음이 제가 지금 하는 일의 밑거름이 됐어요. 저 역시 연구나 논문 하나 더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귀중한가, 깨달았습니다.


저는 제 ‘뿌리’를 알고 싶었고, 세이브더칠드런이란 걸 알고 기뻤습니다. 세이브더칠드런 후원자들 역시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인지 알았으면 합니다. 적은 액수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한 사람의 미래를, 삶을 바꾸는 일이니까요.



건국대 생명특성학과 연구실에서 만난 조명환 교수. “저는 제 ‘뿌리’를 알고 싶었고, 세이브더칠드런이란 걸 알고 기뻤습니다. 세이브더칠드런 후원자들 역시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인지 알았으면 합니다.”


15달러의 손길이 열어준 세상으로 향한 창. 조명환 교수는 그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예전의 자신처럼,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빈곤, 불평등 속에서 고통받는 세계의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선의와 아름다움, 한 평범한 인간이 보내온 사랑의 온기를 생각하며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 세이브더칠드런 코리아는 현재 아프리카와 아시아 9개 국가(네팔, 니제르, 말리, 미얀마,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우간다, 인도네시아, 잠비아)에서 해외결연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동의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발달을 지원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기반으로 모자보건과 영양, 영유아발달, 기초교육, 학교보건과 영양, 청소년기 발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해외결연후원 신청문의 02-6900-4400


마케팅커뮤니케이션부 이선희     사진 조명환, 세이브더칠드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