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브더칠드런소식지 149호
[나누는 사람들] 결연아동, 세이브더칠드런 1호 후원자가 되다
2019.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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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이를 구하면 아이가 세상을 구한다’라는 이번 100주년 캐치프레이즈가 제 삶이지 않을까 싶어요.'


어릴 적 선물로 받은 독일제 피규어를 지금껏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조영웅님


한국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길거리에 내몰린 아동을 구하고자 1953년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세이브더칠드런. 그 당시 세이브더칠드런 미국, 캐나다 등 후원자와 결연을 맺어 후원을 받던 9살 아동이 세월이 흘러 다국적기업을 이끄는 상무가 되고 세이브더칠드런 코리아 1호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세이브더칠드런이 한국에서 맺은 결실이며 세이브더칠드런 코리아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조영웅 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미디어커뮤니케이션부 김하윤 사진 세이브더칠드런



한국전쟁을 직접 겪으셨던 거지요? 그 당시 어땠는지 말씀해주세요.

부모님이 황해도에 사셨는데, 일제에서 해방 후 소련군이 북한에 내려올 즈음 남한으로 피난 왔어요. 그때가 만 1살이었는데 또래 친구에게 옮아서 백일해*에 걸렸어요. 겨우 밥이나 배급받아 먹던 때였는데 밤에 기침하고 열이 나니 어머니가 고기국을 먹였는데 오히려 설사를 했어요. 옥수수 같은 것만 계속 먹다 갑자기 고기를 먹으니 탈이 난 거죠. 나이아신이 결핍되면 나타나는 증상으로 그걸 펠라그라라고 해요. 어릴 때 잘 못 먹고 이사를 자주하다 보니 몸이 많이 약했어요.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즈음에 인천 송현동에 살았고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당시 제가 거기 있었어요. 여섯 살이었는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월미도를 중심으로 연합군(미군과 한국군)이 마을을 수색했는데, 마을 할아버지에게 물을 달라고 하면서 수통에 우물물을 떠갔던 기억이 나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나서는 주민들이 신작로에 나와 군사 행진에 동원되기도 했었죠. 10월에 중공군이 남하하자 대구로 피난 갔다가 서울 마포 쪽으로 상경해서 살았어요. 마포, 서대문 등지에서 60-70년을 살았네요. 생계 때문에 어른들이 돈을 벌러 가면 낮에는 아이들끼리만 동네 골목에서 뛰놀며 자랐어요.


*백일해란, 급성 호흡기병으로 2군 법정감염병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토할 정도로 심한 기침이 2주 이상 지속되는 병입니다. 1살 미만 아기가 감염될 경우 무호흡증으로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세이브더칠드런 결연후원은 어떻게 받게 된 건가요?

제가 9살이었던 1954년인가 55년에 세이브더칠드런과 연결됐어요. 어머니 친구분이 ‘차 집사’라는 분이었는데 동네 마당발이었어요. 그분이 어머니께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이런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주셔서 후원을 받았죠.
나오미 미도우 부인과 결연을 맺게 되어 편지를 꾸준히 주고받았어요. 미국 네브라스카주 오마하 지역에서 미용실을 하는 분이었는데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다 들어주었죠. 녹음기, 카세트테이프, 책, 사전, 스케이트까지 사서 보내주셨어요. 부인과 주고받은 편지를 전부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사하면서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이 독일제 도자기 인형 하나 남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 인형을 참 좋아했거든요. 이 물품들을 받으려고 종로 2가까지 갔었어요. 세이브더칠드런이 물품을 나눠주는 보관소가 그 곳에 있었거든요. KC로 시작하는 일련번호를 알려주면 전달받는 식이었죠.


결연후원을 받던 어린 시절,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해요.

외롭게 자라 그런지 동물을 좋아했어요. 북아현동 살 때는 어머니께 닭을 사달라고 해 닭이랑 병아리를 길렀죠. 운동도 곧잘 했어요. 초등학교 시절 몸 담았던 축구부가 서울 지역에서 1등을 하기도 했었죠. 경제적 여유가 없다 보니 대학 진학할 생각도 없었고 공부를 안 했어요. 어머니께서 성적표 보자는 얘기를 한 번도 안 하셨는데 고3 때 성적표를 보시더니 “대학 들어가면 등록금 대줄 테니 알아서 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자연스레 도서관으로 발길이 향했어요. 도서관에 갔더니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애들이 다 모여 공부하고 있더라고요. 친구들 잠 깨워주면서 방학 때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해 실력을 따라잡았어요. 어느 학과를 진학할지 담임선생님과 상담하다 동물을 좋아하니 수의사가 되어 보자는 생각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수의과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죠.


세이브더칠드런 결연아동에서 다국적기업의 상무 자리까지 오르셨고 세이브더칠드런 코리아 1호 후원자가 되셨어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해요.

고등학교 졸업 즈음 세이브더칠드런의 공식 후원이 종료됐어요. 대학 들어간 뒤에도 미도우 부인과 편지를 계속 주고받았는데 대학원 입학할 때 등록금도 보내주셨죠. 저에게 영어공부를 하라고 하셨어요. 장학금을 주면서 영어공부를 하라고 하니 안 할 수가 없었죠. 을지로 상가에서 영어책을 사다 당시 유명한 영어 강사 강의를 들으며 영어 회화를 공부 했어요. 대학에서는 수의학 박사, 경영학 석사, 보건학 석사, 전자상거래까지 공부했습니다. 공부를 마친 뒤에 글로벌 기업인 한국화이자제약의 주임으로 입사했어요. 그때 미국대사관 총영사 부인과 회화공부를 하게 됐는데 알고 보니 그분이 세이브더칠드런 코리아 이사였던 거예요. 후원을 권유하는 그분께 ‘사실 나도 세이브더칠드런에서 후원을 받던 아동이다’라고 처음 말했어요. 그렇게 세이브더칠드런과 다시 인연이 이어졌고 후원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가 세이브더칠드런 창립 40주년인 해였어요. 40주년 소식지 특집호에 제 이야기가 실리기도 했죠. 총영사 부인이 다른 나라로 파견되면서 세이브더칠드런 이사직이 공석이 되었고 제가 이사를 맡게 됐어요. 2004년 한국지역사회복리회가 심장병 환아 의료지원을 하던 한국어린이보호재단과 합병하면서 이사직이 종료됐습니다. 올해 세이브더칠드런이 100주년이라니 참 반갑네요.


그 후로는 어떻게 지내 오셨나요?

서울보건전문대학 임상병리과 대우 부교수,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겸임교수, 대한수의사회 사무처장, 한국마사회 이사직을 맡았어요. 미도우 부인의 후원과 격려로 공부에 관심없던 제가 대학에 진학하고 영어공부를 하며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해 세이브더칠드런을 이끄는 이사이자, 아이들을 돕는 후원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아이를 구하면 아이가 세상을 구한다’라는 이번 100주년 캐치프레이즈가 제 삶이지 않을까 싶어요. 오늘도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후원하는 후원자님들, 직원분들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




[안내] 아동의 개인정보와 신변 보호, 아동간 상대적인 박탈감 예방 등을 위한 노력으로, 현재 후원아동과의 모든 서신교류와 만남은 세이브더칠드런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